17. 노독



노독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by kiki1753 | 2010/06/02 22:41 | 마음의 시 | 트랙백

16. 해당화



해당화

 

 

한용운

 

 

당신은 해당화가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by kiki1753 | 2010/06/02 22:31 | 마음의 시 | 트랙백

15. 봄밤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마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벗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의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by kiki1753 | 2010/05/30 09:50 | 마음의 시 | 트랙백

14. 갈대



갈대 

 

신경림

 

 

언제부터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by kiki1753 | 2010/05/30 09:43 | 마음의 시 | 트랙백

13. 조그만 사랑의 노래




조그만 사랑의 노래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by kiki1753 | 2010/05/03 11:52 | 마음의 시 | 트랙백

12. 만일


만일

 

루디야드 키플링

 

만일 네가 모든 걸 잃었고 모두가 너를 비난할 때

너 자신이 머리를 똑바로 쳐들 수 있다면,

만일 모든 사람이 너를 의심할 때

너 자신은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다면,

 

만일 네가 기다릴 수 있고

또한 기다림에 지치지 않을 수 있다면,

거짓이 들리더라도 거짓과 타협하지 않으며

미움을 받더라도 그 미움에 지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면서 너무 선한 체하지 않고

너무 지혜로운 말들을 늘어놓지 않을 수 있다면,

 

만일 네가 꿈을 갖더라도

그 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또한 네가 어떤 생각을 갖더라도

그 생각이 유일한 목표가 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만일 인생의 길에서 성공과 실패를 만나더라도

그 두 가지를 똑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네가 말한 진실이 왜곡되어 바보들이 너를 욕하더라도

너 자신은 그것을 참고 들을 수 있다면,

그리고 만일 너의 전생애를 바친 일이 무너지더라도

몸을 굽히고서 그걸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한번쯤은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걸 걸고

내기를 할 수 있다면,

그래서 다 잃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네가 잃은 것에 대해 침묵할 수 있고

다 잃은 뒤에도 변함없이

네 가슴과 어깨와 머리가 널 위해 일할 수 있다면,

설령 너에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다 해도

강한 의지로 그것들을 움직일 수 있다면,

 

만일 군중과 이야기하면서도 너 자신의 덕을 지킬 수 있고

왕과 함께 걸으면서도 상식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적이든 친구든 너를 해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모두가 너에게 도움을 청하되

그들로 하여금

너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만일 네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1분간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60초로 대신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세상은 너의 것이며

너는 비로소

한 사람의 어른이 되는 것이다.

by kiki1753 | 2010/04/28 11:26 | 마음의 시 | 트랙백

11.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주세요.

그녀의 미소 때문에... 그녀의 모습...

그녀의 부드러운 말씨...그리고 내 맘에 꼭 들고

힘들 때 편안함을 주는 그녀의 생각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라고 말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이여,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나

당신 마음에 들기 위해 변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렇게 얻은 사랑은 그렇게 잃을 수도 있는 법.

내 뺨에 흐르는 눈물

닦아 주고픈 연민 때문에 사랑하지도 말아주세요

당신의 위안 오래 받으면 눈물을 잊어버리고,

그러면 당신 사랑도 떠나갈 테죠.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

사랑의 영원함으로 당신 사랑 오래오래 지니도록.

 

by kiki1753 | 2010/04/22 12:18 | 마음의 시 | 트랙백

10.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류시화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을 떄
그 슬픔에 기대라

저편 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할 때
그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저편 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

by kiki1753 | 2010/04/22 11:27 | 마음의 시 | 트랙백

9.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을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들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by kiki1753 | 2009/04/19 16:20 | 마음의 시 | 트랙백

3. 작문 [내가 좋아하는 something ] 내가 좋아하는 지하철 2009 03 21

[내가 좋아하는 something ; 2009 03 21 ]


내가 좋아하는 지하철

권한울



  내가 1년 동안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은 약 672시간으로, 일수로 환산하면 28일 정도이다. 집에서 학교를 왕복하는 데 하루에 두 시간이 소요되고, 주말이나 방학에는 대부분 시내에 있는 학원을 다니기에 이를 왕복하는데도 두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나는 하루에 두 시간씩 일주일이면 14시간, 한 달이면 56시간, 일 년이면 672시간을 지하철에서 보내는 셈이다. 나는 이 672시간의 대부분을 바깥세상을 구경하며 보내는데, 특별히 할 일도 없거니와 세상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어서이다.


  지하철 의자는 버스와 달리 마주보고 앉게 되어 있다. 마주보고 '앉은' 사람들끼리 눈을 마주치게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람이 많은 출퇴근 시간에 나는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을 볼 수 없다. 그 대신 나는 1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서 있는' 사람과 마주보게 된다. 손잡이에 특별히 방향이 표시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항상 앉은 사람을 마주보고 선다. 마땅히 쳐다볼 곳이 없어 눈을 지그시 내리까는 순간, 나와 '서 있는 사람'은 평소에 잘 보지 않은 곳을 보게 된다. 서 있는 사람은 나의 정수리를, 나는 서 있는 사람의 신발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쩐지 이 순간이 측은하게 느껴진다.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는 신체의 일부를 서로가 사심 없이 바라봐 주는 것 같아서이다.  


  그런가하면 지하철에서 나는 평등을 발견한다. 나이 든 사람도, 젊은 사람도, 잘 사는 사람도, 못 사는 사람도 기다란 의자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지하철은 잘 사는 사람이든 못 사는 사람이든 동일한 칸에 타고, 같은 의자에 나란히 앉는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잘 산다고 지하철 요금을 더 받는 경우는 없으며, 못 산다고 지하철 요금을 깎아주는 일도 없다.

 

  지하철에서 나는 변화하는 사회를 실감하기도 한다.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 이후, 하나둘씩 철거되는 지하철 쓰레기통을 보며 나는 테러 위기를 실감했다. 신문자판기에서 신문을 처음 사던 날, 나는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체하는 날을 상상했다. 지하철을 놓칠까봐 환승하는 내내 뛰었던 나는, 위치추적시스템의 발달과 친절한 전광판 설치로 더 이상 뛸 필요가 없게 됐다. 환승역을 중심으로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과 불경기를 몸소 느꼈다.


  내가 지하철을 좋아하는 까닭은, 지하철에서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까닭은,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이 농후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세상의 의미도 달리 해석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하철에서 더 많은 사람과 스치고, 잠깐이나마 그들의 표정을 읽고, 그 표정에 얽힌 세상을 만나는 그 날까지 '지하철 좋아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하철 노선표에 '빨주노초파남보' 중 빨간색 노선이 빠진 101가지 이유를 찾을 때까지 말이다.


by kiki1753 | 2009/03/30 11:02 | 작문 | 트랙백

2.작문 [내가 입사하려는 회사가 나부터 초임을 깎는다는데] '내 자식세대에서는 안 된다' 2009 03 15

[논작 2; 내가 입사하려는 회사가 나부터 초임을 깎는다는데-2009 03 15]




'내 자식세대에서는 안 된다'


권한울




  '내 뒷마당에서는 안 된다(Not In My Backyard)'


  이는 지역이기주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로써, 각 단어의 앞 철자를 따와 님비(NIMBY) 현상이라 불린다. 지역이기주의는 '내 뒷마당에서는 안 된다'는 공간의 개념을 넘어 시간의 개념에서도 발생한다. '내 세대에서는 안 된다'로 상징되는 '시간적 님비현상'은 특히 통일에 관한 논의에서 자주 등장한다.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 내 세대에서 만큼은 곤란하다'는 식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잡 셰어링은 좋은 운동이지만 내 세대에서만큼은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나 역시 '시간적 님비현상'의 예외가 될 수 없다. 여기서 잡 셰어링이란 노동 시간과 임금을 줄이는 대신에 일자리를 더 늘리는 일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특히 노동 시간을 줄이는 대신 대졸 초임을 삭감하는 방식으로 잡 셰어링 운동을 하고 있다. 이는 미국 발 금융위기로 경제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일자리가 줄어들 것을 염려하여 국가가 적극 장려하고 있는 운동이다. '백수 350만 시대'를 맞은 한국에서 잡 셰어링은 상생의 시대를 열 수 있는 뜻 깊은 운동이다. 그렇지만 왜 하필 내 세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


  '내 자식세대에서는 안 된다'


  시간의 개념을 조금만 확장시킨다면 의외로 문제는 쉬워진다. 그 일이 왜 하필 나에게 일어나느냐고 탓하기 전에,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내 자식세대에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현 상황이 부당하게 느껴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수많은 아버지들이 직장을 잃고 쓰러졌지만 바로 그 덕분에 우리나라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2009년 금융위기로 온 세계가 어렵지만, 삭감된 초임을 받으며 사회에 첫 발을 디디는 우리 세대야말로 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자식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 주기위해 고통을 감내한 아버지의 사랑을, 나 혼자 잘 살겠다며 여기서 무너뜨릴 순 없다. 나의 아버지도, 미래의 부모가 될 나도 '내 자식세대만큼은 안 된다'는 생각을 갖기만 한다면, 잡 셰어링은 더욱 뜻 깊어질 수 있다. 사회에 첫 발을 디디는 내 자식들을 위해 기꺼이 당신의 월급을 내 놓을 수 있다면, 미래의 내 자식들을 위해 기꺼이 삭감된 임금을 감수한다면 적어도 내 자식세대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by kiki1753 | 2009/03/30 10:52 | 작문 | 트랙백

8. 나 그렇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 그렇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한용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
뛰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잠시라도 같이 있음을 기뻐하고
애처롭기까지 만한 사랑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않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나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나 그렇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by kiki1753 | 2009/03/19 22:37 | 마음의 시 | 트랙백

1.작문 [Do what you love] 사랑한다는 것, 사랑하는 일을 한다는 것 2009 03 08

 

[ Do what you love-2009 03 08]



사랑한다는 것, 사랑하는 일을 한다는 것


권한울



  헤어지자. 이별 얘기를 꺼낸 건 내 쪽에서였다. 내게 처음 사랑을 가르쳐 준 그에게 어쩐 일인지 나는 잔인한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한 말에 나조차도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거듭 이별을 얘기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만나서는 안 될 운명인 것처럼, 지금 이 순간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나는 이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 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반면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누군가 내게 길을 제시해주면 나는 그 길을 나의 운명이라 여겼다. 그의 삶에는 그가 있었지만, 나의 삶에는 내가 없었다.


  그가 가르쳐 준 사랑은 생각보다 단순한 것이었다. 행여나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 머뭇거리는 나와 달리 그는 성큼성큼 나에게로 왔다. 그는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싫어하면 싫어한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하기 싫은 일도 기꺼이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와 사귀면서 나는 사랑하는 법을 알아 갔다. 상처받기가 두려워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한 내가 처음으로 말다툼이라는 것을 해보고 밤새 울어도 봤지만, 내 가슴에 남는 건 '상처'가 아닌 '사랑'임을 알았다. 아프고 힘들었을지라도, 그마저도 사랑이었음을 감사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배웠다.


  사랑한다는 것, 사랑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상처가 두려워 시작부터 포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것, 설레면서도 동시에 불편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는 싫어하는 일도 기꺼이 할 수 있는 것, 지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사랑하는 일인 것이다.


  보고 싶어.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내게 처음 사랑을 가르쳐 준 그에게 나는 또 잔인한 말을 하고 있었다. 나를 겨우 잊고 있었을 텐데, 그 마음을 헤집어 놓는 잔인한 말을 또 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배운 또 한 가지. 사랑을 할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할 때는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by kiki1753 | 2009/03/16 00:19 | 작문 | 트랙백

9.작문 [길] 길 구경 2009 02 28

 

<길- 2009 02 28>



길 구경

권한울


  6시간동안 길만 보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낯선 중국 땅에서 나와 수진이는 6시간째 길 구경을 하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두운 밤하늘에 이따금 눈에 띄는 별들과 자욱한 안개 뿐이었다. 우리가 탄 버스와 안개가 맞부딪칠 때마다 안개는 공중에서 흩어지며 사라졌다. 중국 도로의 중앙선은 직선이 아닌 점선이었고, 우리가 탄 버스는 중앙선을 넘나들며 평온한 곡예를 하고 있었다. 표지판 하나,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운전기사 왕따꺼는 내비게이션 없이도 잘 가고 있었다. 이따금 차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도로에 앉아 있었고, 붉은 색 조명 아래 식사를 하고 있는 집이 보였다. 나무로 된 기찻길이 보이기도 했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보였다.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흙길을 갈 땐, 울퉁불퉁 버스가 흔들리는 게 재미있다며 웃었다. 횡단보도가 없어 중국 사람들은 아무 데서나 길을 건넜고, 왕따꺼는 길 건너는 사람들을 보면 경적을 울렸다.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비키라고 경적을 울린 줄 알았는데, 계속 지켜보니 이는 '차가 오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그들만의 신호였다. 그렇게 '한 밤의 길 구경'은 6시간이나 계속되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우리 눈은 초롱초롱했던 것 같다.


  이는 작년 6월, 숙명토론 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입상자들과 교수님이 함께 떠난 '중국 고구려 역사 탐방'에서 겪은 일이다. 광활한 중국 땅에서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보기 위해서는 6시간에 걸친 이동도 감수해야 했다. 평소 차창 밖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6시간의 이동시간마저도 신나는 여행의 일부였다. 길 위의 사람이 궁금했고, 길옆의 풍경이 궁금했기 때문일까, 길을 구경하는 동안 나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길 위에서 그들의 삶을 훔쳐보고 싶어서일까, 창문 안으로 보이는 그들의 움직임에 눈을 떼지 못했다.


  우리의 삶은 모두 길 위에서 행해진다. 우리는 길 위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죽는다. 길 위에 지어진 어느 산부인과병원에서 태어나고, 길 아래 양지바른 곳에 묻힌다. 길 위에 지어진 집에 살고, 길 위를 걸으며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진다. 잘 닦인 아스팔트길을 보고 한국의 발전 수준을 짐작해보고, 울퉁불퉁 흙길을 보며 중국인의 삶을 짐작해본다. 길 위를 바삐 뛰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도시 삶을 훔쳐본다면, 한가로이 길옆에 앉아 세상을 구경하는 시골의 삶을 훔쳐볼 수 있다. 자신이 더 빨리 지나가기 위해 경적을 울리는가 하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경적을 울리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우리네 삶과 문화가 길 위에서 행해지는 까닭에 길은 우리의 삶, 그 자체이다.


  오늘도 나는 차창 밖을 바라본다. 길 구경을 한다. 삶을 만난다.

by kiki1753 | 2009/03/16 00:11 | 작문 | 트랙백

8.작문 [관점과 입장] 젊다는 것 2009 02 21

 

<관점과 입장- 2009 02 21>


젊다는 것


권한울


  나는 즉흥적이지만 결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다. 여행에 있어서 말이다. 여행지에서 나는 그때그때 기분과 상황에 따라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싶으면 박물관에 가고, 맥주를 마시고 싶으면 맥주를 마신다. 스카일 레일을 타고 싶으면 나는 스카일 레일을 타고, 기차를 타고 싶으면 기차를 탄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매사에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도록 모든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는 치밀한 사람이다. 해외여행의 경우, 나는 한달 전부터 그 나라의 유명한 박물관과 맥주공장, 이용 가능한 교통수단 등을 조사한 후 이를 숙지한다. 이를 바탕으로 나는 여행지에서 기분과 상황에 따라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행 스타일은 일상생활에도 두루 적용된다. '지하철을 탈지 버스를 탈지'를 결정하는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시장이냐 정부냐'에 대한 경제관을 결정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나는 늘 선택의 문제와 마주한다. 그럴 때면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사전조사를 시작한다.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고 다양한 관점을 검토한 후, 가장 나중에 입장을 정하는 것이다. 설사 나의 입장이 결정되었더라도 새로운 관점이 추가되면, 언제든지 나는 기존의 입장을 철회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입장이 있지만 입장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두루 열린 다양한 관점'이다.


  그러나 내 친구는 '입장의 동일함'을 늘 강조한다. 입장이 같아야 세상을 보는 시각이 동일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처한 상황이 누군가 다르다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입장에 앞서 다양한 관점을 확보하려는 나와, 동일한 입장이 동일한 관점을 낳는다는 그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는 세상에 서로 다른 관점과 입장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 결정 또한 여러 관점들 속에서 내가 내린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입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입장의 동일함'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이를 내가 수집한 '다양한 관점 목록'에 추가할 뿐이다. 그리고 드라마 작가 노희경의 말을 곱씹으며 나를 위로한다. 그녀는 말했다. "자신이 어떤 확고한 입장을 취할 때 자신은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라고. "젊다는 것은 입장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인정하고 언제든 그들의 편에 서 줄 수 있는 것"이라고.

by kiki1753 | 2009/03/16 00:01 | 작문 | 트랙백

7.작문 [뿐 도 와] 내가 영화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은 이유 2009 02 07

 

<뿐 도 와- 2009 02 07>



내가 영화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은 이유



권한울



  타인의 삶을 훔쳐보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삶을 훔쳐볼 수 있어서이다. 현실에서는 꼭꼭 숨겨진, 음지에 파묻힌 삶의 이야기도 영화에서는 툭 까놓고 얘기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는 동성애자의 사랑을 이해하고, 장애인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의 풍경이 세세히 묘사된 영화를 통해 나는 파리의 생선장수와 영국의 길거리 음악가의 삶을 훔쳐본다. 이들이 어떻게 삶을 연명하는지, 어떻게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는지 훔쳐본다. 뿐만 아니라 나는 영화를 통해 이웃의 무관심 속에 죽어가는 일본 4남매의 삶을 훔쳐보고, 피부색으로 차별받는 흑인의 삶을 훔쳐본다. 나는 영화를 통해 타인의 삶을 훔쳐본다.


  내가 책보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타인의 삶을 훔쳐 '볼' 수 있어서이다. 일본의 해변에 자리잡은 '게이들이 행복하기 위해 지어진 호텔'에서 때로는 게이라는 이유로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물폭탄을 맞고 놀림을 받으면서도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위로하며 살아가는지를 훔쳐볼 수 있어서이다. 게이라는 이유로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용서하는 딸의 무뚝뚝한 눈물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측은한 눈빛을 '볼'수 있어서이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소녀가, 담요가 덮인 유모차의 작은 틈새로 세상 구경하는 것이 전부인 소녀가 어떻게 사랑을 시작하는지 훔쳐 '볼' 수 있어서이다. 한쪽 눈을 깜빡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식물인간과도 같은 남자의 눈이 되어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함께 '볼'수 있어서이다.


  내가 영화이야기를 늘상 하는 이유는 영화 <타인의 삶>처럼 어쩌면 나 역시도 타인의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나의 삶으로 여기고, 그들의 희로애락을 내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내 얘기를 해야 할 순간에 정작 그들의 이야기를 해 버리고는 '내 이야기를 했다'고 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나의 것이 되어버린 '타인의 삶' 때문에.


  내가 영화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은 이유는 '너와 나의 인생도 결국 한번일 뿐'이라고 말하는 영화가 좋아서이다. 영화는 국적도, 나이도, 피부 색깔도 다른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지만, 결국 서로 부딪치고 상처 입히는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한다. 한번 뿐인 인생, 서로 상처 주는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화가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은 서로 다름을 인간애로 끌어안고, 한 번 뿐인 인생 함께 잘 살아보자는 것이 아닐까.

by kiki1753 | 2009/03/15 23:41 | 작문 | 트랙백

7. 꽃지는 저녁




꽃지는 저녁

 

정호승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by kiki1753 | 2009/02/14 17:32 | 마음의 시 | 트랙백

6. 수선화에게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을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도 가슴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by kiki1753 | 2009/02/14 17:15 | 마음의 시 | 트랙백

6.작문 [광장] "우리가 사는 세계가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2009 01 31

 

[광장 2009 01 31]




"우리가 사는 세계가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권한울





  "우리가 사는 세계가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영화 <빈 집>에서 김기덕 감독은 이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의 몸은 물리적 공간에 실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정신은 가상 세계를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집은 어쩌면 껍데기만 버려진 '빈 집'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감독이 물리적 공간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그는 꿈과 현실 세계를 모두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김기덕 감독의 말은 더욱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가상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현실의 잣대를 가상 세계에 들이댈 수 없고, 가상 세계의 잣대를 현실에 적용할 수 없다. 오히려 각기 다른 세계의 특성을 면밀히 파악하고 이 둘의 공존을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시민들이 모여 토론을 하곤 했던 광장이 있다. '아고라'로 불리는 이 광장에서 시민들은 물건을 사고팔기도 했고, 정치적 토론을 하기도 했다.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까닭에 자신이 뱉은 말은 곧 자신의 인격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21세기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광장이 인터넷에 존재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정치․ 경제적 이슈에 대해 토론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익명성' 때문에 때론 거짓과 욕설이 난무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현대판 '아고라'를 비난할 수 있을까?

 

  "인터넷의 미덕은 신뢰성이 아닌 투명성에 있다." 이는 지난 학기 언론정보학과 전공 수업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의견을 말하는 오프라인과 달리, 온라인은 익명성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도 없거니와 그 정보들에 신뢰성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인터넷에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회는 보다 투명해질 수 있다. 인터넷의 미덕은 신뢰성이 아닌 투명성에 있는 것이다. 이렇듯 온라인과 오프라인 광장의 각기 다른 특성을 구분하고 이를 인정해준다면 좀 더 살만한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by kiki1753 | 2009/01/31 18:22 | 작문 | 트랙백

5-1.작문 [인류 최대의 발명품] 진정한 21세기 발명품 2009 01 25

 

 

<인류 최대의 발명품- 2009 01 25>



진정한 21세기 발명품


권한울



  내가 처음 핸드폰을 갖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핸드폰을 가진 덕에 우쭐했던 것도 잠시, 전교생이 모두 가지게 되었을 정도로 핸드폰은 흔해졌다. 수업시간에 문자를 보내다가 선생님께 혼나는 학생들이 많아졌고, 핸드폰을 압수당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우리는 이제 설레는 마음으로 연인을 기다리기보다는 시시각각 상대방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익숙해졌고, 불쑥 친구 집에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기보다는 전화를 걸어 친구를 불러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워졌다. 우리는 어느새 휴대폰 알람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연인과의 전화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 혹시나 옛 연인이 술에 취해 전화하진 않을까, 우리는 꿈속에서조차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한다. 365일 현대인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연인도, mp3도, 컴퓨터도 아닌 핸드폰이다.


  핸드폰은 이렇듯 우리의 일상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핸드폰을 통해 약속을 정하고, 의사를 전달한다. 언제 어디서나 통화할 수 있다는 핸드폰의 장점 때문에 우리는 늘 핸드폰을 소지한다. 이러한 핸드폰의 이동성은 또한 '진화'를 거듭해, 카메라, 인터넷 등 새로운 기능이 첨가된 핸드폰은 우리의 일상에 더욱 깊이 파고들어왔다. 우리는 이제 핸드폰을 통해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촬영하고, 어디서든 메일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우리는 핸드폰을 통해 수많은 목숨을 구하기도 하고, 불편한 진실을 고발하기도 한다. 중국 광저우 대지진 참사를 세상에 처음 알린 건 현장에 있던 중국인의 휴대 전화였고,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에서 경찰의 무분별한 진압을 고발한 건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 한 장이었다.


  일상에 스며든 핸드폰은 사람의 감정의 문제에까지 관여한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문자에 답장이 늦는다고 쉽게 감정이 상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다. 전화를 더 자주 거는 사람이 약자가 되고, 문자에 늦게 답장하는 사람이 강자가 되는 핸드폰 세상에서 연인들은 사랑의 줄다리기에 여념이 없다. 처음에는 사랑의 큐피드였던 핸드폰은 점차 사랑이란 이름의 구속이 되기도 하고, 이별 후에는 옛 연인의 전화가 걸려 오진 않을까 기다림의 대상이 되고 만다. 현대인의 사랑은 단둘이 하는 것이 아니라 ‘휴대폰을 통해서’ 하는 듯 보인다.


  발명품이란 아직까지 없었던 물건을 새로 생각하여 만들어 낸 것을 뜻한다. 금속활자, 종이, 전구 등이 그 예로써, 이것들은 인간 생활에 유용하게 쓰였던 것들이다. 누군가 나에게 21세기 최고의 발명품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감히 핸드폰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아가 비단 21세기 뿐 아니라 인류 사상 최대의 발명품이라고 말할 것이다. 신 유토피아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핸드폰은 작은 손 안에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핸드폰이 진정한 발명품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그것이 결코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사랑의 족쇄가 되지 않아야 한다. 핸드폰이 가진 편리함과 유용함이 부작용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때, 비로소 핸드폰은 진정한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by kiki1753 | 2009/01/31 18:20 | 작문 | 트랙백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